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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SIONISTA/GUYS OF PASSION

기타와 나, 30년간의 러브스토리


 

인생을 통틀어 무엇인가 하나에 온 힘을 집중해 열정을 쏟아 부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그 열정은 한 순간에 지나기도 하고, 순간의 열정이 인생 전반을 뒤흔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빨간내복’님의 기타와 함께 한 30년 인생 이야기는 단순한 음악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타와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삶이 어떻게 변했으며, 어떤 인연들을 맺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13편에 걸쳐 연재된 이야기를 이 곳에 모두 담을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무엇보다 그 안에 있는 열정에 주목해서 그의 인생 여정을 함께 따라가 볼까요?



 


 

음치였던 내가 음악을 사랑하게 된 이유, 그 사연은 이렇다. 동네에 함께 잘 놀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다른 친구보다 키도 훌쩍 컸고, 유머감각도 풍부한 친구였는데, 그 친구에겐 2-3살 위의 정말 예쁘고 고왔던 누나가 있었다. 대개 사춘기의 남자아이들은 친구누나에게 연정을 품기 쉬운 법. 그 누나는 얼굴도, 목소리도 정말 예뻤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 친구를 찾아갔는데 마침 그 누나가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 곡은 나중에 물어 알게 되긴 했지만 로망스라는 곡이었다.


그 당시 나에게 그 모습은 정말 충격이었다. 단아한 그 자태, 수줍은 듯 갈무리한 음색, S라인의 빼어난 몸매. 갑자기 후광이 빛나며 나는 한번에 확 끌려 바로 강렬한 사랑에 빠진다. 물론, 기타와..
어떻게 그런 예쁜 소리가 날까. 자다가도 내가 멋지게 기타를 잡고 로망스를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형편이 넉넉지 않아 기타를 사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어린나이였지만, 그런 사정을 뻔히 알기에 어머니께 말씀도 드리지 않았다. 사실 그때 당시 통기타는 장발한 형들이 어깨에 둘러 메고 돌아다녀, 어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던 퇴폐와 상스러움의 상징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로망스가 자꾸만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집안이 조금 넉넉한 친구가 돈을 빌려 준다고 하여 생각보다 일찍 기타를 장만할 수 있었다. 대출 경험 전무였던 중학교 2학년에게 조금 과한 액수여서 망설였지만, 기타와 로망스의 유혹은 그런 우려를 한참이나 뛰어넘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새로 사온 기타를 꺼내어 열심히 닦으며 새 기타의 냄새가 너무나도 행복하게 느껴졌다. “그래, 난 이제 로망스 연주자가 될거야!” 그런데 이 기타를 제대로 사기는 한 것일까 하는 의심이 들만큼 기타에서는 이상한 소리만 났다. 우선 로망스는 접어두고, 기타소리를 내는 일을 시작했다. 일단, C를 잡고 징지기 징지기 두어 번 해놓고, 시조 읊듯이 “외로울 때면” 또다시 징지기 징지기 -멈추고-  “생각하세요” 이런 식으로 하는데, 한번 노래를 다 끝내면 온몸이 땀투성이가 될 만큼 육체적인 노동강도(?) 가 강하게 느껴졌다. 시간은 또 오죽이나 오래 걸리던지 도를 닦듯 한 곡을 끝내면 30분은 후딱 지나가 있을 정도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누구도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고, 집안 식구들의 엄청난 눈치와 핍박 속에 구석방에 처박혀 열심히 한 곡만 연습했다. 다행히 나에게 재능은 없어도 뚝심은 있었다. “난 한 놈만 패”라고 누군가 그랬듯 여러 달 동안 한 곡만 죽어라 연습하니, 나름대로 진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한 기타 하는” 친구로 통했고, 그때 친구들의 눈 속에 떠오르던 무한한 존경심이란. 수개월간의 고행과 찢어지는 손가락의 아픔을 상쇄하고도 남을 무엇이 있었다.


그러다가 좀 떨어져 대학을 다니던 형이 겨울 방학을 맞아 집에 왔다. 그런데, 형이 기타를 보더니 능숙하게 잡으며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치며 노래하는 것이었다. 세상에나! 그리고 징지기 징지기가 아닌 손톱으로 튕기는 아르페지오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레퍼토리가 세 개로 늘어난 그 때의 그 만족도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가요 책을 구해 아는 코드가 나오는 곡을 일단 쳐보는 그런 나날이 계속 되었다. 노래는 몰라도 좋았다. 그냥 나 이거 칠 수 있다 뭐 이런 혼자만의 시위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던 중, 정말 엄청난 비극이 일어났다. 기타를 어쩌다 따뜻한 방의 벽에 기대어 세워 놓았는데, 울림통과 넥의 연결부위가 부러져 버린 것이다. 이른바 허리 부러진 기타. 그 기타를 부여잡고 목 놓아 울었다. 로망스 로망스 하면서.형이 아교와 못으로 억지로 붙여 놓았지만, 보기에도 우스운데다 넥과 스트링 사이가 너무 떠버려 웬만한 아귀 힘으로는 F가 잘 안 잡히는 기타가 되어버렸다.
어쨌든 소리는 나는 그 허리 부러진 기타를 고3 말 때까지 간직했다.



 

고3이 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간 약간 아주 약간 미루어 두었던 공부를 해야 했다. 내가 워낙 좀 독한 데가 많다. 그간 손에서 놓지 않던 내 분신 같던 허리 부러진 기타의 스트링을 일부러 다 잘라버리고, 1년간 기타를 잡지 않으리라 결심한다. 그리고 정말 기회가 있어도 일부러 기타를 잡지 않았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1986년은 정치적 격동기에 들어서게 된다. 군사정권으로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워진 듯 하나, 정치적으로는 아직도 깜깜한 암흑기였다. 그와 연계하여 그 다음해의 대선을 앞두고 호헌철폐에 대통령직선제를 들고 나온 대규모 학생시위가 본격화 된다. 그 혼돈의 시절 거의 매일을 최루탄의 매캐한 연기 속에서 보내다가 집에 오기 일쑤였는데 시커멓다 못해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 친구가 잡혀가고, 머리가 깨지는 현실은 우릴 점점 더 고민만 하는 룸펜으로 몰아만 갔다. 그 즈음 친구를 하나 만났다. 그런데 이 친구의 기타솜씨가 일품이었다. 그래서 둘이 거의 매일 만나 한잔커피에, 또 한 주전자의 막걸리에 인생을 논하고 또 매일처럼 노래를 하다시피 했다. 노래만 할 수 있으면 어디든 갔다. 한적한 카페나 교외는 우리의 주무대였다. 그전에는 기타도 노래도 둘이 해본 적은 없었는데,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듯 했다. 마치 둘이 해바라기라도 된 듯.


우선 무대공포증을 없애려 일부러 청중을 대상으로 노래하고 연주했다. 그 당시 가장 인기 있던 그룹은 해바라기였다. 우린 해바라기의 모든 노래들을 해체하다시피 했다. 악보를 구하고, 그도 안되면 수없이 듣고 전주 간주의 애드립을 배우고 노래를 연습했다. 그래도 모르겠으면 우린 콘서트장에 노트를 들고 가기도 했다. 그렇게 참 열정적이었다.



그때는 누구 앞에서 노래한다는 것이 그리 일반적이지 않을 때였다. 작은 카페에서 우리는 시키지 않아도 손들고 나가 새로 연습한 곡을 용감하게 부르기도 했고, 그만 오라고 할 때까지 찾아가곤 했다. 그런 것이 다 한마디로 무대 공포증을 걷어내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열정이다. 조금 운치 있다 싶은 교외의 명소는 다 가보았다. 무서울 게 없던 우리는 그런 곳에 가면 꼭 노래를 시작하곤 했다. 그렇게 남 앞에서 노래하는 걸 무척 자연스럽게 여기게 되었고 친구와 그간 연습했던 노래들을 모아 아는 형이 운영하던 카페에서 작은 콘서트를 하기도 했다. 별것도 아니었지만 마음이 뿌듯하고, 그렇게 노래할 동안은 이문세나 양희은이 된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고향인 충청남도 청양에서의 방위생활은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워낙 왁자지껄하게 살다 와서 그런지 5시면 일과가 끝나는 방위의 특성 상 남는 시간들을 주체할 수 없었다. 밤마다 뒷산에 기타를 메고 올라가 가슴이 시원해질 때까지 미친 듯이 노래를 하곤 했다. 청양이라는 곳은 참 재미있고도 이상한 곳이었다. 학생들을 위한 문화공간이란 전무하다시피 했고, 문화적으로 다양한 곳에 사는 다른 지역 청소년들과 달리 문화적 탈출구가 없었다. 그래서 청양의 청소년들에게 독서지도를 하고 계셨던 형님과 함께 청소년을 위한 문화교실을 꾸며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름하여 ‘청소년 음악교실’


모두들 너무나도 열성적으로 모임에 임했고, 점점 인간적인 유대도 쌓여가며 틀이 잡혀가니 그동안 노출되었던 갈등들도 무난히 봉합이 되어갔다. 음악이란 개인적인 만족감만으로는 무의미하다. 음악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눔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연도 하게 되었다. 벌써 20년이나 지난 이야기이다. 지금은 공식적인 모임 자체는 해체가 되었지만, 청양 지역사회에서 문화적으로 주도적인 모임으로 성장하며, 여러 번의 공연도 했다고 한다. 내가 그렇게 관여했던 1년간은 내 인생에서도 보석처럼 빛나는 시기였다. 비록 어떤 식으로든 음악을 하고 싶다는 개인적인 이유로 시작한 일이긴 하지만, 그 속에서 제가 채우려던 욕심보다 수천 배의 힘을 얻게 되었다. 


세월에 휩쓸리다 보니 음악을 잊게 되었다. 일본에서의 유학생활은 살과 뼈를 깎는 고통만큼이나 힘겨웠다. 극히 새로운 환경, 거기에 바뀌어 버린 전공 때문에 밤도 주말도 잊고 살았다.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다 싶을 만큼 몸과 마음이 피폐해갔다. 그나마 가족이 있어 힘을 내고 용기를 내어 갈수 있었다. 미국 생활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도저히 이번에는 넘어설 것 같지 않은 시련이 닥쳤다. 힘든 일을 아주 여러 번 독하게 겪어 이젠 그 어떤 시련도 자신이 있다 싶었는데도 정말 힘겨웠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기타 생각이 간절해졌다
. 그렇게 까맣게 잊고 있던 기타를 다시 꺼내어 불러본 곡이 "저 창살에 햇살이" 라는 곡이었다. 힘이 없어 겨우 겨우 한 소절씩 부를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게 한 곡을 부르고 나니 겨우 조금 마음의 안정이 왔다. 그렇게 어설프게 음악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놀라울 만큼 회복이 빨라졌다. 다음은 무슨 노래를 할까 하는 설렘도 또 노래할 때만큼은 여러 가지를 잊을 수 있으니 너무나도 좋았다. 블로그에서 무척 많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간 건강도 많이 좋아졌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바뀌어 버렸고, 예전처럼 수다도 늘었다. 많은 분들이 노래를 들어주시고, 함께 공유할 무언가가 생겨난 듯 하다. 이 모든 게 음악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못한다. 잃어버린 건강 덕(?) 이라고도 말 못한다. 아마도 그 음악 속의 사람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슨 곡을 하든 그 속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들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이 또 계속해서 사랑하며 살고 싶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그 무엇 때문이든 그러한 것들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음악이라는 매개체가 아닐까 한다.

기타와 함께 한 빨간내복님의 인생 여정을 그의 '열정'이 가장 빛났던 순간을 중심으로 함께 따라가봤습니다. 가장 힘든 시련이 찾아왔을 때, 기타와 음악을 다시 찾게 된 건, 음악을 하며 설렜고, 그 속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 함께 만들었던 추억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열정의 순간이 무척 소중했기 때문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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